우리역사 알아보기(고려시대 전기 ~ )

 
고려청자

신라말 호족세력과 6두품 세력이 결합하여 고려시대의 새로운 역사를 열게 되었습니다.

고려의 성립

민족의 재통일은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유민까지 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가 건국(918년)한 후,  발해멸망 후 유민포용(926년)을 통해 민족화합을 꾀하고자 했으며 경순왕의 신라항복(935년)으로 자연스럽게 통합후 내부분열로 견훤이 귀순하자 후백제를 정벌하여 후삼국 통일(936)을 이루게 됩니다.
 

태조와 광종/ 성종의 왕권강화정책

*태조는 호족세력견제를 위해 혼인, 사심관, 기인제도를 적극 활용하였다. 또한 강력한 북진정책으로 서경을 중시하여 청천강과 영흥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보하는 영토확장을 이룬다. 아울러 후대왕들이 지켜야 할 정책방향을 제시한 훈요 10조를 남겼다.
*광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기반을 약화시키고 과거제를 통해서 신진관료를 등용함으로써 前시대보다는 능력중심으로  공복제정을 통해 지배층의 위계질서를 확립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황제를 칭하고 독자적 연호를 사용합니다.
*성종은 유교정치질서의 강화하고자 6두품출신의 유학자를 등용하며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통해 통치체제를 정비하여 지방관 파견, 향리제도를 마련하여 지방세력을 견제하고 유학교육을 진흥하고자 국자감을 정비하고 지방에는 경학박사와 오경박사를 파견하였다. 2성 6부제의 중앙관제도 마련하였다. 

 통치체제의 정비

*중앙정치 조직은 당의 제도를 모방한 2성 6부제를 토대로 고려특색을 보여주는 도병마사(군사), 식목도감(법제, 의식)있었다. 최고 관서인 중서문화성(재신> 국가정책심의/ 낭사> 왕을 비판)을 두고 그 장관인 문하시중이 국정을 총괄하고 상서성아래에  6부를 두고 중추원(군사기밀, 왕명출납)과 어사대(비리감찰)가 있으며 삼사는 곡식, 화폐의 출납에 대한 회계만 맡았다. (조선의 삼사와는 완전히 다름)
*지방행정 조직은 전국을 5도(일반행정단위-안찰사) 양계(군사행정구역-병마사)로 구분하며 군사특수지역인 진을 설치하였다. 중앙에서 지방관이 직접 파견되는 것은 군.현과 진까지였다. 특수행정구역인 향. 소. 부곡의 지방행정은  향리가 담당하였다.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 더 많이 존재하였다. 
*군역제도와 군사조직은  중앙군은 국왕친위 부대 2군과 수도경비와 국방방어를 담당하는 6위로 구성되어 직업군인으로 군인전을 지급받았다. 지방군은 일반농민으로 16세이상 장정들로 주현군(5도)과 주진군(양계)으로 이루어졌다.
*관리등용 제도는 과거와 음서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과거는 제술과(문학적 재능과 정책시험), 명경과(유교경전 해석), 잡과(법률, 회계, 지리등 실용학문)를 실시하며 법제적으로 양인이상 응시할 수 있었다. 실제는 제술과나 명경과는 주로 귀족이나 향리의 자세가 응시하고, 잡과는 백정농민이 주로 응시하였다. 음서제도는 공신과 종실의 자손, 5품 이상 고위관리의 자손등이 과거를 보지않고 관리가 될 수 있었다.

문벌귀족사회의 성립

*지방호족출신으로 또는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관직자를 배출한 가문이 문벌귀족化되었다. 문벌귀족은 과거와 음서를 통해서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치권력과 경제력을 독점하였다.
*이자겸의 난(1126)은 중앙지배층 사이의 분열을 드러냄으로써 문벌귀족사회의 붕괴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 인종은 정치개혁을 추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보수세력과 개혁세력간의 대립이 이루어집니다.
*묘청의 난(1136)은 김부식의 보수세력과 묘청의 개혁적 관리의 대립으로 묘청은 서경천도와 자주적 혁신정치 시행과 금국정벌을 주장했다. 묘청의 난은 문벌귀족사회의 내부분열과 지역세력 간의 대립이며 자주적 전통사상과 사대적 유교정치사상의 대립, 고구려계승 이념에 대한 이견과 갈등이 일어난 것으로 귀족사회의 모순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