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알아보기(조선시대 탕평과 세도정치)

수원화성은 정조의 조선개혁을 바라는 프로젝트였다. 

조선시대의 탕평

숙종처음 탕평론(골고루 편애하지 않고 정치하자)을 제시하지만 실제로는 편당적인 인사관리로 환국이 일어나 붕당정치의 변질을 가져왔다.

영조의 탕평정치는 탕평파를 육성하여 온건한 완론탕평론(왕과 신하도리 정립)지향하며 공론의 주재자인 산림의 존재를 부정하고 서원을 대폭정리하고 이조전랑의 권한을 축소(3사관리선발 폐지/ 후임추천폐지)하였다. 탕평비를 건립하여 기억하고자 했다.
민생안정의 개혁정책으로 균역법(1750년>군포 1필, 결작 1결 2두)을 시행하고 악형금지(압슬령, 자형, 낙형)하고 사형수에 대한 3심제를 엄격적용하였다. 또한, 속대전을 편찬하여 법전체계를 정비하고 신문고를 부활시켰다. 동국문헌비고를 발간하며 노비종모법(아비가 노비, 어미가 양인)> 어미를 따라서 양인)시행으로 국가재정을 확충하였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 사망후 죽지 않기 위해 자신의 측근세력 강화하여 왕권확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강력한 준론탕평론(붕당의 시비판단>시파와 벽파)추진하여 척신과 환관을 제거하였다. 규장각(왕실도서관> 과거시험주관, 비서기능과 문한기능)을 강력한 정치기구로 육성하고 유능한 인재등용을 위해 초계문신제와 검서관에 서얼출신을 등용시켰다.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군사적 기반을 갖추었다. 수원화성 프로젝트(정약용의 거중기, 배다리(행차), 화성행차(백성과 만남)를 통해서 정치적 군사적 기능을 부여하여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수령이 직접 향약을 주관하여 사림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하였다.
기타정책으로 서얼차별금지, 노비추쇄법 폐지와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위해 신해통공(1791년 시전'금난전권'폐지)을 실시하였다.
편찬사업으로 청에서 수입한 '고금도서집성', 대전통편(대원군의 '대전회통'구분), 동문휘고(외교문서), 탁지지(호조), 추관지(형조), 무예도보통지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세도정치

일련의 탕평정치는 결과적으로 왕에게 집중된 권력이 외척세력인 특정가문(혈통)인 안동김씨나 풍양조씨가 정조 사후, 3대(순조~철종) 60여년(1800 ~ 1863)동안 권력을 독점강화하였다.
세도 정치기에는 붕당은 물론 탕평파집단의 대립적 구도는 사라졌다. 따라서 세도정치는 많은폐단이 있었다. 고위관리직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3사의 언론기능은 유명무실해졌다. 비변사가 핵심적인 정기기구가 되어 소수가문이 독점하였다,
왕권약화는 매관매직과 탐관오리의 조세수탈로 이어져 삼정문란(전정, 군정, 환곡)이 일어났으며 이에 각지에서 민란(홍경래의 난, 임술농민봉기)이 발생했다. 민심의 동요와 새로운 사상출현(정감록, 천주교, 동학)하여 사회는 점점 혼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