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알아보기(조선 근대로의 이행>대원군집권 ~ 대한제국)

들어가기 앞서 수기로 만든 역사연표로서 근대화과정을 개괄적으로 짚어보자










조선의 근대화과정

흥선대원군(1863~1873)은 안으로는 세도정치의 문제점을 타파하고자 삼정문란을 개혁하고, 왕권확립을 위해 경복궁 중건과 대전회통 편찬 그리고 서원철폐를 시행하였다. 밖으로는 외세침략을 격퇴하며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확고하게 유지했다.(병인양요, 신미양요>척화비 건립)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빌미로 강화도조약(1876)을 맺고 부산, 원산, 인천 개항했다. 치외법권, 해안측량권 등의 불평등 조약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조약이다. 이어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을 맺은 뒤 다른 서구 열강과도 차례로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들 모든 조약이 최혜국 대우를 규정한 불평한 조약이였다.
반대세력인 유생들은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였다. 구식군인과 하층민에 의해 임오군란(1882)이 일어났고 청에 원병이 들어와서 내정간섭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갑신정변(1884)이 발생한다.

개항이후 조선정부는 부국강변을 목표로 개화정책을 실시한다. 정책전담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한다. 일본과 청, 미국에 사절을 보내 신식문물울 배우게 한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하고자 했다.

갑신정변(1884)김옥균과 박영효의 주도로 청과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며 인민평등과 호조의 재정일원화를 혜상공국을 타파하여 자유로운 상업발전을 꾀하고자 했다. 하지만, 청간섭으로 실패하였다. 이후에 갑오.을미개혁(일본간섭)에 영향을 주었다.

갑오개혁(1894)은 입헌군주제와 신분제를 폐지하고 탁지아문이 국가 재정을 관할하였다.
동학농민운동(1894)은 전주화약이후 집강소를 설치했지만, 청.일본군이 개입하여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6월-갑오개혁강요)하였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 체결(일본승리)했지만 일본의 한반도지배력강화에 우려에 러.프.독의 삼국간섭이 행해진다. 이에 일본은 을미사변(1895: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천인공노한 테러를 자행하고 을미개혁(단발령 시행등)에 관여한다. 일본의 무력에 고종은 신변우려로 러시공사으로 파천(1896)하기에 이른다.
한편, 독립협회(1896~1898)는 의회설립운동 추진과 자주국권, 자유민권(헌의 6조(중추원)활동을 펼치지만 황국협회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다.
고종은 환궁 후 대한제국(1897~1910)을 선포하고 구본신참을 국정원칙으로 광무개혁을 단행하였다.

주권수호운동의 방향정립

향후 독립운동의 방향은 무장투쟁과 실력양성운동 양대축으로 제시되었다.
의병전쟁은 최익현(유생출신), 신돌석(평민출신)주축인 을사의병과 정미의병에서 13도 창의군으로 발전하였다.
애국계몽운동으로 보안회 조직과 신민회(공화정목표, 신흥무관학교=> 105인사건으로 해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