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알아보기(민족의 독립운동)

민족의 독립운동의 시작

항일의병전쟁은 을사조약을 계기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안중근장군은 이또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사살하고 장인환과 전명운은 친일파 스티븐스을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하였다.
의병전쟁은 민종식, 최익현 양반출신 의병장과 신돌석 평민의병장이 중심으로 고종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대거 의병이 합류했다. 13도 창의군 결성으로 이어지고 서울진공작전전개했지만 실패(1908)한다. 이들은 독립군으로 발전하여 만주와 연해주일대로 활동을 이어간다. 대표적인 구국운동과 저항정신은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일제하 항일 무장 독립투쟁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은 초기에 여러 사회단체설립과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보안회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시키는 데 성공한다. 헌정연구회는 입헌정치체계 수립을 목적으로 활동했다.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운동전개은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었다.
특히, 신민회 국권회복과 공화정체의 국민국가 건설을 목표로 비밀결사조직이였다. 국내적으로 문화적, 경제적 실력양성운동과 국외적으로는 독립군기지의 건설등 군사적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였지만 105인 사건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외적으로 일제의 무단통치로 인한 크게 위축된 시기에 제1차 세계대전 후 민족자결주의 대두와 2.8 도쿄독립선언에 고무되었다.
서울에서 시작해서 지방도시로 농촌지역으로 파급되었다. 비폭력(태극기) 운동은 차츰 무장투쟁(낫, 태극기)으로 바뀌었다.
국외로 확산되어 만주와 연해주, 미국, 일본 등지로 확대되었다.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전 민족이 참여한 대규모 독립운동이 일어나며 민족의 주체성을 확인해 나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09)는 상하이에서 수립되었다. 민주주의에 입각한 민주공화제와 대통령제를 채택하며 3권분립의 헌정체제를 갖추어 연통제(비밀연락조직망:군자금), 교통국(통신기관: 정보수집)설치하였다. 또한 애국공채를 발행하고 독립신문을 간행하며 사료편찬소가 있었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항일독립운동의 분수령이 되었다.

국내외 무장독립투쟁

국내에서는 6.10만세운동(1926)과 신간회(1927,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 연합)조직되었다(민족단결, 기회주의 배격, 정치.경제 각성/ 교육차별철폐, 소작.노동쟁의 지원)그리고, 광주학생항일운동(1929)일어나 우리민족의 저력을 보여줬다.
국외에서는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집단 거주지를 개척하고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여 독립군부대를 조직해 나갔다.

1920년에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봉도동전투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가 청산리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일본군 보복으로 간도참변이 일어났다.1921년에는 자유시 참변 후 다시 만주로 이동하여 1923년에 참의부(임시정부직할), 정의부, 신민부가 결성되고 1930년대에는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으로 재편되었다.일부는 동북항일연군(공산주의계열)활동하였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일부가 조선독립동맹계열 조선의용군으로 결성되어, 중국공산당과 연합하였다. 1940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어 연합국일원으로 참전하였다. 또한 일본에 선전포고도 하였다.

항일무장투쟁은 김원봉의 의열단과 김구의 한인애국단이 대표적이다. 이 단체는 식민통치 기관파괴, 일본고관과 친일인사를 처단하였다. 주요 의거활동을 한 독립운동가로는 강우규, 김익상, 김상옥, 나석주, 이봉창, 윤봉길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