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알아보기(대한민국의 성립과 발전)


광복직후 우리 현대사를 한 눈에 대략적으로 정리해봅시다.

광복직후 국내정세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패망은 느닷없는 광복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국가건설의 열망과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전부터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건국강령(1941)제정 공포,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독립동맹, 국내의 여운형주도의 조선건국동맹도 각각 원칙을 발표했었다.
하지만, 한반도 38도선을 기준으로 이북(소련), 이남(미군)으로 나뉘어 일본군 무장해제이유로 군정을 실시하였다. 미.소냉전과 국제질서 속에서 좌익세력과 우익세력의 극한대립이 신탁통치문제로 더욱 격화되었다. 1945년 12월 신탁통치 문제의 대립과 격화는 자주독립 통일국가 좌절과 민족분단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미.영.소)에서는 임시정부수립과 미소공동위원회설치를 하기로 했으나, 불발되었고, 5년간 신탁통치 협정에 대해서 좌.우익대립으로 분열과 갈등은 계속되었다.

대한민국의 수립과 한국전쟁

미소공동위원회의 단체구성을 놓고 결렬되고, 한반도 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되었다.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가결했으나 소련반대로 남한만의 5.10 단독선거(1948)를 치른다. 이어 제헌국회(국호와 헌법제정)구성되어 8.15에 이승만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1948)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 4.3사건(단독선거 반대시위 무력진압으로 인명피해 발생)과 여수.순천10.19사건(제주4.3사건 진압출동명령 거부한 14연대 일부군인들의 반란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승만정부는 사회질서 확립을 목적으로 반공정책강화와 농지개혁을 단행합니다. 한편, 제헌국회에서는 일제잔재청산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자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제정하였습니다(1948.09).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비협조적 태도로 친일파 처벌은 좌절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소련의 지원 하에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조직되어 토지개혁과 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하여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습니다.(1948.09.09)

6.25전쟁은 국내적으로 좌우게릴라 활동과 실업과 물가폭등과 국제적으로 미군이 철수하고 한국을 제외한 애치슨선언으로 소련의 지원하에 북한은 기습남침을 감행하였다.(1950.06.25) 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유엔 16개국 파병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수복과 북진하였지만, 중공군 개입으로 3년간 휴전선일대에서 교착상태의 장기전으로 돌입하였으며, 이후 휴전회담이 진행되어 유엔군, 북한군 및 중공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1953.07.27)
3년간의 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과 전 국토가 초토화되어 모든 산업시설이 파괴되었고 남북한사이에 불신과 적대감정으로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습니다.

민주주의 시련과 발전

이승만 정부

1952년 전쟁중에 발췌개헌(대통령직선제)을 강행하였고, 사사오입개헌(1954)을 통한 장기집권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1960년 정.부통령 부정선거 자행하여 4.19혁명이 일어나고, 이승만대통령은 물러나고 허정 과도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내각책임제와 양원제> 헌법개정)
장면내각(제2공화국)이 탄생했지만 정치적 갈등과 계속되는 시위는 박정희 군부세력의 정변으로 단명하고 말았습니다.

군사정권의 통치(박정희 ~ 전두환)

5.16 군사정변으로 군부세력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하여 반공강화와 민생안정을 공약을 발표하고 군정을 실시하였습니다. 헌법개정을 통해서 정권을 장악하여 박정희정부(3, 4공화국)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박정희정부는 조국근대화를 국정목표로 경제개발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한.일국교 정상화(1965)와 베트남전에 군대를 파병하였습니다. 3선개헌(1969)과 비상계엄선포(1972)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10월 유신을 단행하였습니다. 이는 민주적 헌정체제를 부정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고, 장기적인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였으나, 이에 많은 국민들이 저항하며 민주화를 지속적으로 요구하였습니다. 갑작스런 10.26사태로 대통령이 피살되고 유신체제는 종말하였습니다.(1979)

국민들의 민주화는 한층 더 요구되었으나, 12.12사태로 군사권을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세력이 계엄령철폐와 김대중석방을 요구하며 시작된 5.18민주화 운동을 무장군인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7년 단임의 대통령 간선제의 헌법개정을 하였고,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언론통폐합, 삼청교육대등 인권유린을 하였습니다.

6월 민주항쟁과 민주정부의 탄생

1987년 박종철고문사망사건과 이한열 연세대생의 죽음과 4.3호헌조치를 계기로 6월 민주항쟁으로 직선제개헌과 민주헌법 요구로 결국 6.29민주화 선언을 발표하고 여야합의에 의해 5년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이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치러진 선거는 야권단일화 실패로 신군부출신의 노태우정부(제6공화국)가 들어서고, 북방정책을 통한 공산권국가와의 외교수립과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의 성과를 이루어냈습니다.

1993년에는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 완전한 군정종식을 선언하고 공직자재산등록, 금융실명제 등을 법제화하고 부정부패척결에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신군부세력을 단죄하고 지방자치제를 부활시켰으나, 정권말기 경제위기로 한국경제가 추락했습니다. 1998년 김대중정부는 경제위기 극복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회복과 발전을 천명하고 남북평화정착을 위해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실현시키고 남북경제 활성화와 금강산관광,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평화통일의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