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알아보기(고대경제의 구조와 생활)


고대의 경제구조

국가는 왕(王)이며 수취체제는 조(組: 조세, 전세)-용(庸: 군역, 요역)-조(調: 공물, 공납)구성되며 관리는 지배층으로서 녹봉과 수조권을 인정받고 관료전, 전시과, 과전법으로  농민, 상인, 수공업자를 나누었다.
경제파트에서는 누가(계층별) 어떤 경제체제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가에 촛점을 둡니다. 국가와 지배층은 소비계층이고, 농민, 상인, 수공업자들은 생산과 소비를 동시에 수행하는 계층입니다.

삼국시대의 경제정책은 국가주도의 수취체제였으며 조.용.조체제는 적용되지 않는다.
조세는 집의 경제력차이, 가호구분으로 곡물,삼베,공물을 정해 내놓았다.
역은 15세 이상 남자가 맡았으며 관리의 대가는 수조권(관료전X, 식읍, 녹읍O)만 인정하였다.
농민(권장), 상인은 국가통제를 받았다. 시장은 경주 5c말 처음 등장하여 509년 지증왕 동시전), 수공업자(공인(匠人=공장(工匠)도 국가통제를 받았다. 초기에 노비, 중앙집권화이후 전문장인으로 활동하였다.

고대의 경제생활

귀족의 경제생활은 잘 먹고 잘 산다것이다. 원래 재산이 있고, 관리는  녹봉과 녹읍은 관리에게 주는 땅으로 노동력(노비)징발과 곡식(조세)收入권리를 주었다. 식읍(왕족, 공신)..cf. 관료전지급은 조세만 인정하였다. 신문왕때는 고리대가 성행하였다.
농민의 경제생활은 지지리 궁상이였다. 세금납부와 경작지 확충(비탈, 계곡)의 어려움이 있었다. 농업기술의 향상과 철제농기구가 4~5c 보급시작되어 6c에 널리보급 되었다. 우경법은 6c 보급되었다.

통일신라의 경제정책은 국가주도로 수취체제는 조.용.조가 적용되었다.
조세(전세)는 곡식은 1/10(생산량), 역(役)은 군역(군인), 요역(노동자)있다. 정(丁)은 16~60세이다. 공물(貢物)은 공납으로 특산물이 있었다.

*세금수취근거장부(문서)가 있었는데, 신라민정문서(=신라촌락문서=신라촌락장적)는 매년 조사하고 3년마다 작성됐으며 1933년 일본 동대사의 정창원(왕실창고)에서 발견되었다. 그 문서(서원경=충주)에는 토지(논, 밭, 촌주위답, 내시령(관직)답), 人기준(6등급), 家기준(9등급=>사람 수에 따라)세밀하게 작성되었다. 그 외에 노비, 소, 말, 뽕나무, 잣나무, 호두나무 등 기록되었다.

관리들에게 대가로 수조권만 인정하였다. 삼국시대에는 녹읍과 식읍이 있었다. 통일신라때 신문왕(687)은 녹읍폐지와 관료전지급(노동력X, 조세(=조세권만)하였다. 성덕왕(722)은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였다. 국가의 토지 지배력강화책이였다 하지만, 경덕왕때 녹읍이 부활되는 등 왕권약화와 귀족세력이 득세하였다. 농민들은 토지소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상인들은 통일前 지증왕때 동시가 시작되어 통일後에는 서시, 남시가 생겨났다.
수공업자는 전문적 장인으로 관청에 속해 있었다.

무역은 삼국시대에 고구려는 남.북조와 교류, 백제는 남조, 왜와 교류하였으며 신라는 진흥왕때 한강장악 후 당항성 직접 교류하였다. 신라촌, 방(신라마을), 신라소(관청), 신라관(여관), 신라원(절)이 중국에 있었다.

발해의 수취체제는 당의 조.용.조 체제 적용(조세=>전세는 1/10, 역=>군역, 요역, 공물은 특산물)하였다. 농민들을 밭농사중심, 수공업자들은 말, 상인들은 무역로(발해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