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알아보기> 근.현대의 경제와 생활(1)


개항 이후, 서구문물 수용과 자주적인 근대화를 모색했지만 외세의 경제 침략이 본격화되어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일제 강점기일제의 경제적 침략은 우리에게 고통을 겪게 했다. 광복 이후 새로운 경제발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으나, 분단과 전쟁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컸다.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는 비약적 성장을 일구어 냈고, 한국은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변모하고 있다.

외세의 경제 침략과 국민 경제의 모색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을 비롯한 서양 여러 나라와 국교를 맺고 통상 교역을 시작하였다. 일본이나 청에 시찰단을 파견하고 전담 기구를 설치하여 기계 및 신기술을 도입하고 근대적 경제 제도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체결된 불평등 조약으로 조선 상인들의 피해는 많아지고 외국 상인이 나라 안을 자유롭게 다니며 영업하게 되고 거래에 외국 화폐가 사용되기도 했다. 일본 상인과 청의 상인이 가담하여 경쟁하였다. 조선 상인 중에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무역 활동에 참여하는 상인이 등장하였다. 

교역의 확대는 값싼 외국산 면제품은 영세한 조선의 가내 수공업의 타격을 주었고, 일본으로 쌀 유출이 크게 늘어나서 쌀 부족과 쌀값 인상에 따른 물가 상승이 나타났다. 수출보다 수입이 많아 귀금속이 대량으로 유출되었으며 사치 풍조가 확산되었다. 일부 지주와 상인은 불법적인 방법을 통해 토지를 획득함으로써 대지주로 성장해 갔다.

청과 일본은 군사위협을 병행하여 자국상인을 보호하면서 경제적 이권을 강탈하였다. 임오군란 직후 청은 전국에 자국상인이 점포를 내고 영업할 수 있었고, 아관파천 이후 서구 열강들은 내정간섭이 본격화되며 경제적 이권탈취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일본은 대륙침략을 위해 우리나라의 남북을 연결할 철도부설에 주력하며, 서울과 부산, 서울과 의주, 서울과 인천을 잇는 철도부설권을 차지하였다. 외국의 이권 침탈로 자립경제의 기회를 상실하였다.

대한 제국기에 근대적 국민경제를 수립하기 위해 식산흥업 정책이 추진되었다. 전환국을 설치하여 화폐제도 개혁과 중앙은행 설립을 추진하며 근대적 기업설립에 나섰다. 또한 교육기관도 설립되었다. 쌀유출을 막기위한 방곡령을 시행하였다.여러가지 근대적 제도를 시행과 활동을 벌였지만 일제의 침략으로 식산흥업의 노력은 좌절되었다. 러.일전쟁중에 일본인을 재정고문으로 임명하고 황실 수입을 국유화하며 일본의 제일은행이 중앙은행 기능을 맡도록 했다. 황실소유의 토지를 강탈하고 여러 구실로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시켜 동양척식 주식회사는 일본인 토지를 늘릴 수 있도록 지원했다. 러.일전쟁이후 일제는 식민지화를 위한 경제적 토대를 갖추었다. 이에 반대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자는 경제적 구국 운동이 활발해졌다. 보안회일제의 황무지 개간에 대해 반대 투쟁을 통해 좌절시켰다. 을사조약 이후 일제 침략이 강화되자 회사 설립과 인재 육성에 나서는 이들도 많았다. 1907년에는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나 경제자립과 국권 수호를 이룩하고자 했다. 이 운동은 금연, 부녀자의 패물을 팔아 마련한 돈을 성금으로 내어 활발히 전개되었으나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