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알아보기> 근.현대의 경제와 생활(2)

일제의 경제 침탈과 민족 경제 운동

국권 강탈 후 일제는 경제 구조를 일제 상품과 자본을 수출하고, 한국의 식량과 원료를 수탈하는 방식으로 바꾸려고 토지 조사 사업, 임야 조사 사업을 실시하고 회사령, 삼림령, 어업령, 광업령을 공포하였다. 토지 조사 사업은 1910년에 시작하여 1912년 토지 조사령을 공포하면서 본격화되었고 대한 제국 정부 소유지와 황실 소유지, 미신고 토지 및 소유 불분명한 토지 등을 강제로 빼앗았다. 토지의 지주 권리만 일방적으로 인정하고 농민들의 경작권을 부정하여 소작인이 늘어났다. 총독부의 과도한 토지세의 대부분은 식민 통치를 위한 비용으로 지출되었다. 회사령의 공포는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해서 한국인의 기업 활동과 자본 축적을 억제하도록 했다.

1910년대 말,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경제의 침체를 극복하고자 1920년대 시작된 산미 증산계획은 더 많은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 위해서 수리 시설의 확대와 품종 교체, 화학 비료 사용등을 통해 이루졌지만, 대부분 지주는 다소 이익을 봤지만, 소작농은 각종 비용 부담 증가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 1920년대 회사 설립 신고제로 바꾸면서 일본 자본의 침투가 가속화되며 노동자 수는 크게 증가였다. 하지만, 일본 자본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열악한 노동 환경에 한국인 노동자는 혹사 당했다.

1930년대 이후에 일본은 발전된 공업지역으로 유지하면서 만주는 농업과 원료 생산지대로, 한국은 경공업 중심의 중간 지대로 만들기 위해 조선 공업화 정책을 펼쳤다. 주로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대륙침략을 위한 전쟁물자 생산과 밀접한 산업을 추진하며서 금속, 화학 등 중화학 공업이 빠르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회사자본, 상급 기술자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였으며, 한국인 노동자는 최소한의 노동 기본권도 없이 임금과 승진에서 각종 차별을 받았다. 결국 조선 공업화 정책은 한국인의 노동력과 자원을 수탈하여 일본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해 나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농민들은 높은 소작료와 불안정한 소작 기간 등으로,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고용 불안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농민과 노동자의 소작 쟁의나 노동 쟁의생존권 투쟁이자 경제적 민족운동이였다. 1920년 전후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회사를 설립하였다. 대표적으로 경성방직 주식회사, 고무공장, 평양의 메리야스 공장을 경영하였다. 민족기업을 육성하여 경제 자립을 이루자는 물산장려운동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평양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분야는 주로 가내 수공업과 연계한 중소 규모의 공장이 대부분이였다.

1941년에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징병과 징용을 통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강제동원했다. 또한 군수 물자 생산에 집중하기 위해 경제활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전시 동원 체제를 실시하였다. 물자부족의 심화는 광물자원의 약탈은 물론 각종 금속류의 공출을 시행하여 강제로 빼앗아 갔다.

현대의 경제 성장과 자본주의의 발달

8.15 광복은 일제 잔재 청산과 각종 개혁과 제도 정비를 수행할 출발점이였다. 그러나 남북 분단과 정치적 혼란으로 경제적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미군정하에서 물가는 치솟고, 생필품 부족 사태가 벌어지고 북한의 전기 공급 중단으로 남한의 경공업 중심의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정부 수립 이후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시작되고 농지개혁법이 제정되면서 실시하였다. 유상 매수, 유상 분배를 원칙으로 농지 개혁은 소작 제도를 폐지하고 근대 농업 경제 발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귀속 재산을 민간에 불하하는 정책도 추진하여 산업 자본 형성에 기여하였다.

6.25 전쟁한국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기간 시설 등이 파괴되고, 생산 시설의 절반이 파괴되었고, 미국은 많은 경제 원조를 제공하였다. 원조는 소비재와 원료에 집중하였다. 미국의 원조 물자로 물자 부족이 해소되고, 소비재 공업도 성장하였다. 1950년대 후반에 경제 원조는 차관으로 전환되면서 한국 경제는 고충을 받으며 중소기업이 파산되었고, 서민의 생활은 어려움을 겪었다.

4.19 혁명 이후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고 5.16 군사 정변 이후 본격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새로 수립된 제 1차(1962~1966), 제 2차(1967~1971)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었다. 이 기간 고도 성장이 이루어지고, 광.공업의 비중이 높아지는 등 경제 구조의 변화도 뚜렷해졌다. 이 시기 외국의 차관과 국내의 풍부한 노동력을 결합시켜 수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정부는 수출 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지만, 수출의 가격 경쟁력을 위해 저임금 정책을 펼쳤다. 1970년 무렵 수출의 벽과 경제성장의 위기를 맞아 외국인의 직접 투자유치 기업에 대한 각종 특혜 제공, 중화학 공업화 정책의 추진 등으로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에 따라 수출 자유 지역(마산, 익산)을 만들고 새로운 공업 단지를 조성하여 중화학 공업 등이 크게 발전하였다. 정부는 경부 고속 국도를 비롯한 도로와 항만 등 사회 간접 시설을 확충하여 물류의 유통이 원활해졌고 녹색 혁명 기치 아래 간척 사업과 작물의 품종 개량도 실시하여 식량 생산이 늘어났다.

1970년대 말석유위기의 발생으로 외국자본과 대외 무역에 의존하는 한국 경제 위기는 더욱 심각해졌다. 1980년대 초 전두환 정부는 경제 구조 조정에 적극 개입하여 1980년대 중반에 경제는 안정화되고 3저 호황(저금리, 저유가, 저달러)을 맞이하여 중화학 분야를 주력으로 한 고도 성장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경제력의 집중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가 심화되는 위기를 가져왔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고도 성장으로 대다수의 인구가 도시에서 생활하게 되고, 노동자의 비중도 크게 늘어났다. 산업화 과정에서 많은 농민이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지만 도시빈민이나 실업자의 증가로 이어졌다. 그들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라는 악조건에 시달려야 했고 땅값과 집값, 전.월세 상승, 물가 상승 등으로 서민의 생활이 어려워지기도 하였다.
1994년에 타결된 우루과이 라운드협정과 다음 해에 세계무역기구(WTO)가 출범하여 새로운 국제 무역 질서가 수립되었고 수입 개방 추세로 인하여 농업 및 1차 산업이 큰 타격을 받았다.
수입 자유화에 대응하여 1차 산업의 구조 조정을 추진하고 다른 나라들과 자유 무역 협정을 체결하여 수출을 증대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1997년에 국제 통화 기금(IMF)사태로 외환위기로 많은 기업의 도산과 대량 실업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위기는 국민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새로운 산업의 성장을 통해 벗어나게 되었다. 한국 경제의 구조와 체질을 개선하는 노력을 이어가며 지역 간, 계층 간, 산업 간 불평등성을 극복하고 모든 국민이 고루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여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달성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