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4> 조선의 폭군: 연산군과 광해군

창덕궁 인정전
조선시대 왕 중 폭군하면 떠오르는 두 명의 왕이 있죠.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입니다. 이 둘은 모두 폐위되어 쫓겨난 왕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과연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지금부터 알아볼까요? 

연산군과 광해군은 왜 쫓겨났나요? 

먼저 연산군은 성종의 적장자로 태어나 세자시절엔 매우 총명했으나, 어머니인 폐비 윤씨 사건 이후 점점 포악해져 결국 신하들에게 탄핵받아 왕위에서 쫓겨났습니다. 반면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을 하며 큰 공을 세웠으나, 형인 임해군과의 갈등 및 인목대비와의 갈등 등으로 인해 인조반정으로 왕좌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연산군은 즉위 후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선비들을 죽였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일삼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유흥을 위해 국고를 탕진했고, 전국 각지에 채홍사를 파견하여 미녀와 양마를 징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균관 유생들을 내쫓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았으며, 사간원 폐지, 경연폐지, 언관제도 철폐 등 언론기능을 약화시켜 독재정치를 펼쳤습니다. 한편 광해군은 중립외교정책을 펼쳐 명과 청 사이에서 실리를 취하려 했으나, 사대주의 세력이었던 서인세력으로부터 반정을 당해 축출되었습니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정치 스타일은 어떻게 달랐나요? 

두 왕 다 처음에는 성군소리를 들을 정도로 좋은 정치를 펼쳤지만 점점 갈수록 포악해지고 무능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나 연산군은 즉위 초까지만 해도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점차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향락에 빠져들면서 나라를 돌보지 않게 됩니다. 게다가 간신배 임사홍과의 결탁으로 인하여 국정농단 사태까지 일어나게 되죠. 이로인해 당시 조정대신이었던 성희안, 박원종 등이 주도하여 일으킨 정변이 바로 ‘중종반정’입니다. 한편 광해군은 임진왜란때 선조를 대신해서 분조수립 및 전쟁 수습등 뛰어난 활약을 펼쳐주었고, 전후 복구사업 역시 훌륭하게 수행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립외교정책을 펼치며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실리를 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훌륭한 군주였지만 대북파와의 갈등으로 인한 인목대비 유폐사건, 영창대군 살해사건 등으로 인해서 후세인들에게는 폭군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연산군과 광해군 중 누가 더 나쁜 왕인가요? 

사실 두 왕 모두 나라를 망하게 한 죄목으로 폐위되었기 때문에 딱히 누가 더 나쁘다고 판단하기 어려워요. 다만 역사학자들이 보는 관점에서는 조금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우선 연산군은 어머니인 폐비윤씨의 죽음 이후 광기어린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권력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신하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많은 피를 흘리게 했어요. 하지만 광해군은 반정세력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생활을 하며 죽을 때까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읽으며 보냈어요. 그래서 백성들 사이에서는 ‘광해군’하면 좋은 왕이었다는 인식이 강했다고 합니다.

사실 역사라는 것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이고, 두 임금의 평가 또한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던지고 계속해서 소통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