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알아보기>(중세경제의 구조와 생활)


중세의 경제구조

고려의 경제정책국가 주도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수취 체제는 당의 조.용.조 체제 적용(조세=>전세 1/10, 3등급 구분, 조운, 조창(창고)하였다. 양안(토지대장)과 역은 군역, 요역(16 ~ 60세 정남(丁))으로 나뉘며 공납(공물)은 상공(규칙적), 별공(비정기적)이 있으며 속현은 향리가 직접 부과했다. 역과 공납은 호적(戶) 즉, 호구장부 파악했으며 삼사, 호부에서 운영했다.

관리대가는 수조권만을 인정했다. 전시과(田: 곡식(1/10), 柴: 땔감, 科: 18등급)운영되었다.
토지제도는 시정전시과(976)> 개정전시과(998)> 경정전시과(1076)로 개편되었다.
전시과 붕괴는 무신정변때 시작되었고 몽고 간섭기때 완전붕괴했다.(권문세족 대농장소유/ 신진사대부 과전법)
*전시과 체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수조권을 인정하고, 누가 행사에 따라 구분되어집니다.
과전(科)은 문무관리에게 지급하는 토지이다. 공음전(功蔭) 5품이상 관리에게 주며 세습되는 토지로 문벌귀족의 경제적 기반이였다. 한인전(閑人)은 6품이하 하급관리 자제중 관직이 없는 사람에게 지급한 토지이다. 군인전(軍人)은 군적에 오른자로 세습되는 토지이다. 구분전(口分)은 하급관리와 군인의 유가족에게 지급하였다. 내장전(內裝)은 왕실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지급했으며 공해전은 관청의 경비를 위해서 지급했고 절에는 사원전(寺院)을 주었다.

*민전(民田)은 전시과는 아니지만 매매, 상속, 기증, 임대등이 가능한 개인사유지이다.(통일신라의 정남=> 정전과 비슷한 성격)
점차 귀족들이 토지를 독점세습하는 경향이 커지면서 전시과 체도가 무너지며, 무신정변을 거치면서 악화되어 고려 말에는 국가재정이 파탄에 이르렀다.

중세의 경제생활

귀족의 경제생활은 잘 먹고 잘 산다. 원래재산은 토지와 노비이고 관리는 과전(수조권만), 녹봉(1년에 2번)을 받고, 대규모농장은 산천을 경계로 노비와 소작농이 생활한다. 그들은 고리대를 이용하여 토지를 빼앗고, 헐값에 사들여 개간하여 토지를 늘려갔다. 이러한 수입을 기반으로 귀족은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반면에 농민은 조상이 물려준 민전을 경작하거나 국.공유지나 다른 사람의 소유지를 경작하였다. 품팔이를 하며 부녀자들은 의류짜는 일을 하며 생계를 우지했다. 새로운 농업기술을 익혀 황무지를 개간하기도 하고 수리시설의 발달과 농기구와 종자개량 그리고 우경법과 시비법이 발달하여 2년 3작의 밭농사가 보급되고 논농사에도 이앙법이 남부지방 일부에 보급되기도 했다. 이암의 '농상집요'와 문익점의 목화씨로 목화재배가 이루어졌다.

수공업은 고려전기에는 관청중심 소 수공업중심이였으나 후기에는 민간중심 사원수공업이 발달하였다. 관청에서는 공장안(기술자명부)에 올려 물품을 생산하고 기술자들은 무기류, 가구류, 금은세공품, 견직물, 마구류등을 제조하였다. 소에서는 금,은 철, 구리, 실, 각종옷감, 종이, 먹, 차, 생강을 생산하여 공물로 납부하였다. 민간수공업은  농촌의 가내수공업이 중심으로 삼베와 모시, 명주을 생산하고 사원에서는 베, 모시, 기와, 술, 소금등을 승려와 노비가 생산하였다.
상업은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하여 개경에 시전을 설치하고 경시서(상행위감독)두었다. 고려후기에는 도시와 지방의 상업활동의 규모가 확대되고 업종의 전문화가 나타나서 개경밖으로 확대되어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를 비롯한 항구들이 교통로와 산업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지방에서는 행상의 활동이 활발하여 여관인 원이 상업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국가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해 소금전매제를 시행하고 화폐경제가 발행되기도 했으나, 일반적인 거래는 곡식과 삼베를 사용하였다.
무역활동은 상업활동의 중심지인 벽란도는 국제무역항으로 번성하였고 과의 무역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왕실과 귀족의 수요품을 수입하고 종이, 인삼등 토산품을 수출하였다. 거란과 여진은 은을 가져와 농기구,식량을 가져갔다. 일본은 수은, 황을 가져와 식량, 인삼, 서적등과 바꾸어 갔다. 또한 서역과의 교류도 활발하여 아라비아 상인들도 드나들며 고려라는 이름이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