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알아보기>(근대 태동기의 경제와 생활)


조선 후기의 사회는 새로운 변화로 인해 근대 경제로 넘어가는 준비과정이었다. 농기구와 시비법을 개량하는 새로운 영농방법을 추구하고 상품작물을 재배하여 소득을 늘려 대자본을 가진 상인이 출현하였다. 수공업생산도 활발해져 민간에서 생산활동을 주도하여 자본축적이 이루어져 상업도시가 출현할 수 있었다.

수취제도의 개편

양난이후 농촌사회는 심각하게 파괴되어 경작지는 황폐화되었고 기아와 질병으로 농촌생활의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또한 지배층에 실망한 농민들은 불만은 고조되었다.이에 국가는 수취체제를 개편하여 농촌사회를 안정시키고 재정기반을 확대하려 했다.

농경지의 황폐화와 전세제도의 문란으로 토지는 30여만 결로 크게 줄었다.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대장(양안)작성하고 토지 1결당 미곡 4두로 고정하는 영정법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각종명목을 부과하여 오히려 부담만 가중되었다.

공납은 방납의 폐해로 농민부담을 가중하여 이를 경감하고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시행하고 점차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납부방식을 토지결수에 따라 쌀, 삼베, 무명, 동전으로 납부하게 하는 제도이다. 토지1결당 미곡 12두만 납부하였다. 공인이라는 어용상인이 나타나 시장에서 많은 물품을 구매했기 때문에 상품수요가 증가하여 화폐경제가 발전하였다.

양난이후 5군영의 성립으로 모병제가 제도화되자, 수포군(군역대신 포를 냄)이 점차 증가하였다.또한 납속이나 공명첩으로 양반이 되어 면역되는 자가 늘어나면서 농민들에게 그 부담이 가중되어 균역법을 시행하여 1년 군포1필만 부담하였다.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1결당 미곡 2두)부담시키고,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의 칭호를 주어 군포1필을 납부하게 했다. 어장세와 선박세등 잡세수입으로 보충케 했다. 하지만 결작의 부담과 군적문란은 농민부담으로 다시 가중되었다.

서민경제의 발전

양반은 토지개간에 주력하며, 농민의 토지를 사들여 지주전호제로 경영해 나갔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은 양반과 지주라는 신분적, 경제적 지위를 이용하여 소작인의 부담을 가중시켰다.고리대를 이용하여 부를 축적했다.

농민들은 황폐한 농토를 개간하고, 수리시설을 복구하고, 농기구와 시비법을 개량하고 새로운 영농방법을 시도하였다. 모내기법을 확대하여 이모작으로 경작지규모를 확대하여 광작농업으로 소득이 증대되어 부농이 나타나기도 했다. 상품작물을 재배하여 시장에 유통함으로써 쌀의 상품화가 활발하였다. 소작쟁의를 통해 권리를 인정받고 일정소작료만 내는 등 시장경제를 이용한 농민들이 있는 반면에 몰락해 가는 농민도 증가하였다. 농촌을 떠난 농민들은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임노동자가 되고, 광산이나 포구를 찾기도 했다.

상품 화폐 경제가 진전되며 도시의 인구가 급증하여 제품수요가 늘어나고 대동법 실시로 관수품의 수요도 늘어났다. 민간수공업자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생산활동에 종사하였다. 대체로 영세규모여서 상업자본의 지배를 받는 선대제(자금과 원료를 미리받아 제품을 생산하는 방식)가 성행했다.
광산은 본래 정부독점으로 채굴했으나, 17세기 중엽부터 민간인들이 세금을 내고 채굴하였고, 청과의 무역으로 은의 수요가 늘어나 은광개발이 활발했으며 18세기 말에는 금광개발도 활발해졌다. 조선후기의 광산경영덕대(광산전문경영인)가 상인물주의 자본을 조달받아 광산기술자와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광물을 채굴하는 분업을 토대로 한 협업으로 진행되었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조선후기에는 농업생산력 증대수공업 생산이 활발해져 상품의 유통도 활발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주역은 공인과 사상이였다. 처음에는 공인이 상업활동을 주도했지만, 18세기이후에 사상이 서울을 비롯해 개성, 평양, 의주, 동래등 지방도시에서 활발하였다. 그들은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여 물품을 교역하고 지점을 두어 상권을 확장하였다. 특히, 개성의 송상은 인삼재배와 판매를 통해 대외무역에도 깊이 관여했으며, 경강상인은 운송업에 종사하며, 선박건조등 활동분야를 넓혀나갔다.
사상의 전국의 장시의 발달로 성장해 나갔다. 상설시장과 5일장등 전국의 유통망을 연결하는 상인은 보부상이었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며 전국적인 장시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포구는 새로운 상업중심지가 되어 장시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선상(경강상인 등), 객주나 여각(선상의 상품을 중개매매역할)등이 활발한 상행위를 하였다.
국내상업의 발달과 함께 17세기 중엽부터 대외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청과는 국경지방을 중심으로 개시(공무역)와 후시(사무역)가 이루어졌다. 비단, 약재, 문방구를 수입하고 은, 종이, 무명, 인삼 등을 수출하였다. 일본과도 왜관개시를 통해 대일무역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조선은 청의 수입품들을 중계무역을 하기도 하며, 은, 구리, 황, 후추 등을 수입하였다. 사무역에서도 의주의 만상과 동래의 내상, 개성의 송상은 무역활동을 활발히 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상공업의 발달은 교환의 매개인 금속화폐(동전)이 전국적으로 유통되며 세금과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었다. 누구나 상평통보만 있으면 물건을 살 수 있었다. 교환수단과 재산축적의 수단이 되었으며, 환, 어음 등의 신용화폐가 보급되며, 이 시기 상품화폐경제의 진전과 상업자본이 성장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