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해요 10> 바퀴로 달리는 자동차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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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차의 역사는 18세기 말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혁신과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자동차 기술의 발전을 시대별로 나누어 살펴볼게요. 1. 자동차의 기원 (18세기~19세기) 🚂 증기 자동차 (1769~1800년대) 최초의 자동차는 1769년 프랑스의 니콜라-조제프 퀴뇨(Nicolas-Joseph Cugnot) 가 만든 증기 자동차입니다. 군사 목적으로 대포를 운반하기 위해 개발되었지만, 속도가 느리고 실용성이 부족했습니다. 1801년 영국의 리처드 트레비딕(Richard Trevithick) 도 증기 자동차를 제작했지만 상용화되지 않았습니다. 🔋 전기 자동차 (19세기 후반) 1830~1840년대에 최초의 전기 자동차 가 개발되었습니다. 1881년 구스타브 트루브(Gustave Trouvé) 가 3륜 전기 자동차를 만들었고, 1899년 라 잠아이 콩탕트(La Jamais Contente) 가 시속 100km를 돌파하며 세계 최초로 100km/h를 넘은 자동차가 됐습니다. 하지만 충전 인프라 부족과 배터리 기술 한계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2. 내연기관 자동차의 등장 (19세기 말~20세기 초) ⛽ 가솔린 자동차의 탄생 1876년 독일의 니콜라우스 오토(Nikolaus Otto) 가 4행정 가솔린 엔진을 발명했습니다. 1885년 칼 벤츠(Karl Benz) 가 세계 최초의 내연기관 자동차(페이턴트 모터바겐, Patent-Motorwagen) 를 개발했습니다. 1886년 독일에서 특허를 받고 자동차 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고트리브 다임러(Gottlieb Daimler) 와 빌헬름 마이바흐(Wilhelm Maybach) 도 비슷한 시기에 자동차를 개발합니다. 🚗 포드와 대량생산 (1900~1920년대) 1908년 헨리 포드(Henry Ford) 가 모델 T(Model T) 를 출시했습니다. 1913년 컨베이어 벨트(조립 라인) 시스템 을 도입하여 자동차를 대량 생산합니다. 덕분에 자동차 가격...

좀 더 알기 10> 조선시대 반정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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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시대의 "반정(反正)"은 기존의 국왕을 폐위하고 새로운 국왕을 옹립하는 정치적 변혁을 의미합니다. 조선에서 대표적인 반정 사례는 두 차례 발생했습니다. 1. 계유정난 (癸酉靖難, 1453년) 비록 "반정"이라는 표현을 직접 사용하지 않지만, 계유정난은 조선에서 왕권을 둘러싼 대표적인 정치적 변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배경 조선 제5대 국왕인 문종(재위 1450~1452)이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 당시 어린 단종(1452 ~ 1455)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어린 왕을 대신해 외척인 김종서 , 황보인 등이 섭정을 하며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이에 문종의 동생인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왕권을 장악하기 위해 반란을 계획했습니다.  전개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 은 신숙주, 한명회 등의 도움을 받아 김종서 와 황보인을 제거했습니다. 이후 단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1455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세조(조선 제7대 왕, 재위 1455~1468)가 되었습니다.  결과 세조는 즉위 후 계유정난을 도운 공신들에게 벼슬을 내렸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경국대전 편찬을 시작했습니다. 반면 단종은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사(賜死, 강제로 죽음을 명령받음)되었습니다. 계유정난은 왕권 강화와 신권(신하들의 권력) 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난 사건이었습니다. 2. 중종반정 (中宗反正, 1506년) 가장 대표적인 조선의 반정 사건으로, 연산군(조선 제10대 왕)을 폐위하고 중종(조선 제11대 왕)을 옹립한 사건입니다.  배경 연산군(재위 1494~1506)은 즉위 초반에는 명군으로 평가받았으나, 어머니인 폐비 윤씨 사건(사사 사건)에 분노하여 학정(虐政)을 일삼았습니다. 무오사화(1498년)와 갑자사화(1504년)를 일으켜 많은 신하들을 숙청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폭정을 펼쳤습니다. 특히 신하들을 탄압 하고 궁녀들과 놀기 위해 궁궐 밖에 연회 공간을 만드는 등 국정을 도외시 하며 백성들에게 ...

궁금해요 9> 한미동맹의 역사(WE GO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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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동맹(韓美同盟, ROK-US Alliance)은 대한민국과 미국 간의 군사적, 정치적 동맹으로,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Mutual Defense Treaty) 체결을 계기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동맹은 한국전쟁(1950~1953) 이후 대한민국의 안보를 보장하고, 동북아시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1. 한미동맹의 형성 배경 ① 한국전쟁과 미국의 개입 (1950~1953)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을 포함한 유엔군이 대한민국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전세를 뒤집었으나, 이후 중국군 개입으로 전쟁이 장기화되었습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이 체결되었고, 휴전 상태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②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1953년 10월 1일) 한국전쟁 직후 대한민국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미국과 대한민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을 체결했습니다. 주요 내용: 대한민국과 미국은 상대국이 외부로부터 무력 공격을 받을 경우 공동으로 대응한다. 미국은 한국 내에 미군을 주둔시킬 수 있다. 이 조약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미국의 핵우산과 군사적 보호를 받을 수 있었으며, 주한미군(USFK)이 계속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2. 한미동맹의 발전 과정 ① 1960~70년대: 베트남전과 경제 지원 대한민국은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전에 군대를 파병(1964~1973)하며 동맹을 강화했습니다. 미국은 이에 대한 보상으로 한국에 경제 및 군사 원조를 제공하여, 한국의 경제 성장을 도왔습니다. ② 1980~90년대: 민주화와 동맹 조정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미국이 전두환 정권을 지지했다는 논란이 일어났고, 이에 따라 반미 감정이 확산되었습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냉전이 종식되면서 한미동맹의 역할이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1994년에는 한국군이 평시 작전권을 ...

궁금해요 8> 자주독립! 대한독립만세! 3.1운동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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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삼일운동) 개요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한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독립운동으로, 일제강점기에 한국인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전국적으로 펼친 비폭력 저항운동입니다. 1. 배경 ① 국제 정세 변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발표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민족들도 스스로 국가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함. 러시아 혁명(1917년) : 약소민족 해방을 강조하며 세계적으로 독립운동 분위기가 확산됨. 파리 강화 회의(1919년 1월) : 세계 강대국들이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조선의 독립도 거론될 가능성이 있음. ② 국내 상황 고종 황제의 죽음(1919년 1월 21일) : 독살설이 퍼지면서 일본에 대한 반감이 커짐. 일제의 무단통치 : 헌병경찰제, 즉결처분권 등 강압적인 식민 통치로 인해 국민 불만 증가.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의 조직적 준비 : 중국과 미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던 인사들이 독립선언을 준비함. 2. 3.1운동 전개 ① 독립선언서 발표 (1919년 3월 1일) 태화관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자진 체포됨. 학생과 시민들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시작함. 비폭력 평화 시위 원칙 : "우리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진행됨. ② 전국적인 만세 시위 확산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퍼짐 3월 1일 이후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지속됨. 3월 5일에는 서울에서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임. 농촌 지역, 심지어 해외(만주, 연해주, 미국, 일본)에서도 만세 운동이 진행됨. 일제의 무력 진압 일본군과 경찰은 무차별 발포, 체포, 고문, 학살 등을 자행함. 대표적인 사례: 제암리 학살 사건 (4월 15일, 일본군이 주민들을 교회에 가둔 후 불을 지르고 총격) 3. 결과 및 영향 ① 국내외 영향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919년 4...

좀 더 알기 9> 4.19혁명의 도화선인 2.28 민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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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8 민주운동(대구 2.28 의거)는 1960년 2월 28일, 대구 지역의 고등학생들이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일으킨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이후 3.15 마산의거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1. 배경 1950년대 후반, 이승만 정권(자유당)은 장기집권을 위해 부정선거를 계획했습니다. 특히 1960년 3월 15일에 예정된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승리를 막기 위해 관권 개입과 선거 조작을 시도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시민과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게 되었습니다. 대구는 당시 정치적 불만이 강했던 지역 중 하나였으며,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반독재 운동을 조직했습니다. 2. 전개 과정 1960년 2월 28일 (일요일) 자유당 정권은 3.15 부정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는 관제 집회를 열기 위해, 대구 지역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등교를 시켰습니다. 하지만 이에 분노한 대구 경북고, 대구고, 사대부고, 대구상고 등의 고등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시위에 나섰습니다. 🔹 주요 구호 "학원의 자유를 달라!" "독재 타도!"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 🔹 시위 진행 대구 경북고 학생들이 학교를 빠져나와 거리로 나섰고, 대구고, 사대부고 등의 학생들도 합류 경찰이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고, 일부 학생들을 연행 하지만 학생들의 외침은 대구 시민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이후 마산, 서울 등지에서 민주화 시위가 확산되는 계기가 됨 3. 영향 및 의의 🔹 3.15 마산의거와 4.19 혁명의 도화선 대구 2.28 민주운동은 3.15 마산의거(1960.3.15)로 이어졌으며, 결국 4.19 혁명(1960.4.19)으로 확산되어 이승만 정권이 붕괴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시작 2.28 의거는 대한민국 최초의 조직적인 학생 민주화 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