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알아보기(삼국의 대외항쟁과 남북국~)

 

삼국의 통일은 완전한 자주적 통일이라기 보다는 외세의 힘을 이용한 한계성이 있지만, 최초의 한반도 민족통일로서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대외항쟁과 신라의 삼국통일

*남북세력(고구려, 돌궐, 백제, 왜)동서세력(수. 당과 신라)이 대립구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수. 당전쟁에서 수나라의 고구려침략에서 을지문덕이 살수대첩(612)을 승리하였고 당과의 침략에 대바하요 연개소문은 천리장성 축조하였다. 당태종은  고구려를 침략하여 안시성전투(645)에서 대패하였다. 고구려의 수.당의 침략에 대한 승리는 민족의 방파제역할을 하였다.
백제의 멸망은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황산벌(계백장군의 결사대)패배로 사비성이 함락(660)되었고, 고구려멸망은 거듭된 전쟁으로 인한 국력소모와 연개소문 사후 국론분열은 나.당연합군의 평양성함락(668)으로 이어졌다. 두 나라의 부흥운동으로 백제부흥운동은 복신, 도침, 흑치상지가 고구려부흥운동은 안승, 검모잠, 고연무가 주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당이 한반도 지배권을 확보하기위해 백제땅(웅진도독부), 고구려땅(안동도호부)와 경주(계림도독부)를 두어 신라귀족의 분열책을 획책하고 있었다. 이에 신라는 매소성전투(675)에서 당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기벌포해전(676)에서 당의 수군을 섬멸하여 드디어 삼국통일 완성(676)의 대업을 이루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의 이용과 고구려 옛땅상실(대동강에서 원산만)이라는 한계성이 있지만 민족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고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몰아낸 자주적 성격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남북국시대의 정치변화와 통치체제

통일신라왕권의 전제화를 통해서 태종무열왕(최초의 진골귀족출신)은 직계자손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신문왕9주5소경체제를 완비하고 관료전지급과 녹읍을 폐지시켰다. 또한 유학사상 강조하며 국학을 설립하였다. 반면에 6두품 세력이 왕권과 결탁하여 정치적 조언과 행정실무를 맡아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왕권도 경덕왕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여 녹읍이 부활되고, 사원의 면세전이 늘어나서 국가재정이 압박을 받고,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으로 농민의 부담은 가중되었다.
발해는 대조영을 중심으로 고구려유민과 말갈족 집단이 동모산기슭에 건국(698)하였다. 무왕때는 영토확장에 힘쓰고 돌궐, 일본등과 교류하며 당과 신라를 견제하였다. 문왕때는 당과 친선관계를 가지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선왕때는 해동성국이라는 전성기를 맞았다. 거란침입으로 멸망(926년)하였다.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 보면 고구려계승한 국가였다.
통일신라는 중앙의 정치체제는 집사부를 중심으로 관료기능을 강화하고 지방조직은 9주5소경 체제로 정비하였다. 이는 수도의 지역적 한계를 보완하고 상수리제도를 통해 지방세력을 견제하였다. 군사조직도 9서당 10정(한주만 2정)을 두었다. 관리의 비리와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감찰기구인 사정부를 두었고 국립대학인 국학을 설치하였다.
발해는 중앙조직의 3성 6부 근간으로 중정대(감찰기구)와 문적원(서적관리), 주자감(교육기관)을 두었다. 지방조직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습니다. 군사조직은 중앙군 10위를 두어 왕궁과 수도경비를 맡게 했으며 지방군은 지방관이 지휘하게 하였다. 

신라말 호족세력과 후삼국

진골귀족의 왕위다툼으로 왕권이 약화되고 사치와 향략으로 국가재정이 바닥나고 이에 농민봉기로 이어져 사회동요가 일어났다. 지방세력이 등장(호족세력)하여 골품제모순의 비판(6두품의 개혁요구)하며 사회개혁을 추구하였다.
견훤은 완산주(전주)를 도읍으로 정하고 후백제(900)를 건국하였다. 궁예는 북원(원주)을 토대를 마련하고 후고구려(901)를 성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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