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더 알기3> 동학농민운동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시발점


동학농민운동의 개요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2월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맞서 일어난 농민봉기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민중항쟁입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삼정의 문란과 일본의 침략 야욕 등으로 인해 백성들이 살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반발한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에게 진압되면서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일제강점기때 독립운동의 뿌리가 되기도 한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의미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1월 전라북도 고부군(현 정읍시)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학정에 대항하여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일으킨 반봉건, 반외세 운동입니다. 이때 등장한 구호가 “보국안민”, “제폭구민” 입니다. 보국안민은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고 제폭구민은 폭정을 제거하고 백성을 구한다는 뜻입니다. 즉, 국가 질서를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동학농민운동의 배경

1892년 가을 충청도 보은 장내리에서 최시형이라는 사람이 교조신원운동을 벌이면서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같은 해 11월 경상도 상주에서도 손병희라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 교단 조직을 정비하면서 더욱 세력을 키워나갔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부에서는 지방관들을 파견하여 민심을 수습하려고 노력했지만 오히려 사태는 악화되었고, 결국 1893년 봄 안핵사 이용태가 파견되어 진상조사를 실시했는데 조사 결과 수많은 부정부패 사건이 드러나면서 주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전개과정

고부 민란 

1894년 1월 10일경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항거하여 발생하였습니다. 
저수지인 만석보를 새로 쌓으면서 인근 농민들로부터 강제로 돈을 징수하자 이를 거부하며 관아를 습격하였고, 이로 인해 해산당했으나 다시 일어나자 조정에서 박원명을 안핵사로 파견하였으나 도리어 폐정개혁 12개조를 제시하도록 하였습니다. 

전주화약

4월 23일 청·일 전쟁 중이던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위기감을 느낀 고종은 5월 7일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난을 진압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고, 6월 9일 황토현 전투에서 패한 후 무장읍성을 점령당한 채 전주성마저 함락되자 각 지역 대표 39명이 모여 전주 화약을 맺고 휴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집강소 설치

전주화약 체결 직후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는데, 이것은 이전까지의 신분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자치 기구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내정개혁안을 마련하기도 했는데, 토지제도 개선 및 조세 제도 개편, 노비문서 소각, 과부 재가 허용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일본군 경복궁 침입

8월 말 경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김홍집 내각은 교정청을 폐지하고 친일내각을 구성하였으며, 이어 친위대와 진위대를 창설함으로써 사실상 군사권 장악에까지 나섰습니다. 그리고 9월 21일 새벽 기습적으로 경복궁을 침범하여 국왕을 감금하고 정권을 장악했으며, 이어서 을미사변을 일으켰습니다. 

우금치 전투

공주 일대에서 벌어진 동학농민군과 토벌군 사이의 전투로서, 19세기 후반 최대 규모의 농민전쟁이자 항일무장투쟁의 효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총사령관 김개남 장군 휘하 약 40만의 농민군이 논산에서부터 남하하여 금구 원평전투에서 승리했고, 이곳에서 북상하던 호남창의대장 전봉준 부대와 합류하여 공주의 우금치 고개를 넘어 서울로 진격하려 했으나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듬해 초 북접 소속의 의병부대가 합세하여 활동하였지만 전세를 뒤집지는 못했고, 일부 잔여세력만이 재기를 도모하다가 체포되거나 처형됨으로써 동학농민운동은 막을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