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알아보기(조선시대의 전란- 왜란/ 호란)



조선의 대외관계

조선의 외교원칙은 사대교린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였다. 
명나라와는 사대정책을 유지했으나 서로의 독립성을 인정하며, 매년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사절을 교환하고, 문화적, 경제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자주적인 실리외교이고, 문화외교인 동시에 일종의 공무역이었다.
여진족과는 회유(결혼, 귀순)와 강경(토벌)의 양면정책을 취하였다. 세종 때에는 4군 6진을 설치하여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국경지방인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두고 국경무역을 허락하였다. 사민정책을을 실시하고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려 했다. 
일본과 동남 아시아와는 교린 정책을 원칙으로 하였다. 이종무장군을 보내 쓰시마를 정벌하는 강경책과 제한된 범위에서 삼포개방(염포, 부산포, 제포)하는 회유책을 병행했다. 또한 류큐, 시암, 자와(자바)등 동남 아시아의 여러 나라와도 교류하였다.

임진왜란(1592>선조)

16세기에 이르러 일본과 대립이 격화되어 3포 왜란(1510>중종)과 을묘왜란(1555>명종)이 일어났다. 이에 새로운 기구인 비변사(임시기구-국방문제>추후 상설기구化)를 설치하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정세를 파악하기도 했다.
붕당등장과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의 전국통일로 정한론이 대두되면서 20만대군이 조선을 침략한다.(1592>선조)
제 1선봉(고니시), 제 2선봉(가토), 제 3선봉(구로다)이 나뉘어 진격해오는 데 충주(신립)에 배수진을 치고 결사항전 했으나 패퇴하고 한양은 5월점령당하게 됩니다.이에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여 명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전국에는 의병이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게릴라전술로 왜군에 큰 타격을 주며, 전란이 장기화되면서 관군에 편입되어 조직화되어 관군의 전투능력도 강화되었다. 대표적인 의병장은 곽재우(의령), 정인홍(합천), 고경명(담양), 조헌. 영규(금산), 정문부(길주)가 있다. 전라도해상 제해권을 이순신장군이 장악하고 왜군의 침략을 좌절시켰다. 한편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고 행주산성에서 승리하며, 명과 일본사이에 휴전협상이 이루어진다. 그 사이 전열을 정비한 조선은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편제와 훈련방법을 바꾸고,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도 개편하는 등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도 제작하였다. 명과 일본의 휴전회담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 침입해왔다. 이를 정유재란(1597)이라 한다. 
전란이 끝나고,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국내적으로 많은 인명피해와, 문화재.서적파괴와 약탈, 토지대장과 호적이 소실되어 식량부족과 국가재정이 궁핍해졌다. 그리고 일본에 잡혀간 조선의 포로들에 의해 성리학과 도자기가 전파되어 일본문화발전의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국외적으로는 조선. 명.일본의 전쟁틈에 북방의 여진족은 급속히 성장하게 되었다.
*참고로 3대 대첩으로 한산도 대첩(이순신), 진주대첩(김시민), 행주대첩(권율)이 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와 병자호란

임진왜란중에 급성장한 북방의 여진족은 후금을 건국(1616)하고 명에 선전포고를 하는 데 전란의 뒷수습으로 인해 명&여진(후금) 줄타기를 하면서 북인주도의 중립외교를 유지해나갔다.하지만, 인조반정(1623)으로 서인주도의 친명배금(명나라와 친교하고 여진(금)을 배척한다)정책은 정묘호란(1627)이 일어나게 해서 정봉수, 이립(의병장)이 싸워 형제관계로 일단락한다. 그러나, 병자호란(1636)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침공하여 군신관계(최명길의 주화파&김상헌의 주전파)를 요구한다. 이에 남한산성피난 후 청에 항전했으나, 굴복(삼전도비)하게된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인질이 된다. 훗날 봉림대군이 효종이 되어 오랑캐에 당한 수모를 씻자는 북벌운동을 전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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